십년만의 외출 (16) – 하양읍 서사리
‘내 혈관에는 코카콜라가 흐르고 있다.’ 코카콜라 회사의 전 CEO 인 고 로베르트 고이주에타 회장의말이다. 얼마나 자기 사업에 대한 열정이며 의지였다면 이러한 표현까지 하였을까. 비슷한 의미로 내 혈관에는외갓집의 정서가 흐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게 있어 시골 혹은 농촌에 대한 정서가 흐르고 있기때문이다. 이는 전적으로 외갓집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정서가 나의 혈관 즉 DNA 같은 역할을 해주고있다.
내 외가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대구에서 동쪽으로 40 리길 대구선 기차를 타면 동촌 반야월 청천 그다음 정거장이다. 정거장에 내리면 코스모스가 반겨주고 보퉁이를 이고 진 시골 사람들은 만나게 되는 것이다.이곳에서 다시금 삼십 여분쯤 팔공산 자락 깊숙이 맑은 시냇물 따라 오르면 한 30 여 초가집 군락으로 모여있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신작로 다라 가다보면 큰 느티나무가 있고 나무 밑에는 누구든 앉을 수 있는 살평상이놓여있다. 그 곳이 내 외할아버지 댁이다. 나는 이곳을 어릴 적부터 들락거렸다. 엄마가 이 집의 4 대외동딸이라 할아버지는 외손자들을 끔찍이 좋아하셨다. 그래서 방학만 되면 찾아가는 곳이다. 사실은 얼마나귀찮았을 터인데 말이다. 이미 친손자들도 대여섯 있었으니 얼마나 성가셨을까. 더구나 외숙모 외삼촌은 더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치도 없이 여름방학 겨울방학 때만 아니라 봄방학 가을방학에 들리는곳이다. 고등학교 2 학년 때부터는 방학 전부를 이곳에서 보내게 됨은 작은 외갓집 동생들의 가정교사 역할을해야 했기 때문이다.
외갓집 사립문 열고 나오면 소달구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신작로 길이 있고 건너면 맑은 물이 졸졸흐르는 개천이 나온다. 저 칠공산에서부터 흐르는 물이다. 이 개천에는 대여섯 개의 크고 작은 돌로 징검다리가놓여있다. 겨울에는 이 개울물 건너다 미끄러져 빠진 때도 있었다. 깊어야 정강이 정도이니 위험치는 않으나차가운 물이었다. 여름에는 이곳에서 멱을 감기도 하는 곳이다. 징검다리 건너면 야산이다. 언덕을 오르면야산에는 콩밭이며 조밭이며 목화밭이 펼쳐져있다. 나는 새벽마다 이 야산에 오르고 기도하는 장소 사색하는장소가 되는 것이다. 새벽잠을 깨면 졸졸졸 흐르는 앞 개천물소리가 정겹다. 찌그듯 찌그듯 우마차의바퀴소리가 하모니를 맞추어 준다.
한국을 방문하면 그동안 몇 번 한국 방문을 대부분 서울에서 잠시 머물렀고 무엇이 그렇게 바빴는지외가를 가질 못했다. 이번 한국 방문 중 두 번째 대구 방문 때는 그리던 외갓집 방문을 드디어 했던 것이다. 군입대 후 한 번도 찾지 못했으니 가히 반세기 만의 방문이니 얼마나 가슴 고동쳤을까.
어릴 적 완행열차를 타고 올 때는 꾀나 멀었던 곳을 확 트인 고속도로로 30 여분 만이었다. 우리 쪽은다섯 형제가 갔고 도착해보니 외가 쪽은 외사촌 일곱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얼마만인가? 그중에는 중학교고등학교 때 본 후 처음만난 형제들이다. 대부분 늙은이들이 되어 말이다. 놀란 것은 내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내가 제일 어렸었는데 오호라 이제는 내가 제일 노인이 되어있었고 하나같이 아래 동생들뿐이다. 이곳에계시던 할아버지 할머니 외삼촌 외숙모 다 객이 되신 것이다. 바로 위 누나들까지 심지어 손아래 동생 중에도셋이나 벌써 객이 되었단다. 외사촌 동생들도 여러 곳에 흩어져 사는데 내가 온다니까 저들끼리 연락이 되어모여 든 것이다.
놀라운 것은 외가의 할아버지 댁을 물려받은 동생의 갸륵한 마음이다. 옛날 할아버지가 지으셨던그리고 우리가 갈 때마다 잠자던 옛가옥을 거의 원형으로 보존해 온 것이다. 지금은 그 곳엔 아무도 살지는않지만 사랑방도 방앗간도 부엌도 쇠죽통도 그리고 맞은편 우물도 사랑방 뒷담도 담 안의 감나무들도 그대로있는 것이다. 대신 동생 가족들은 옛날 큰 텃밭이었던 곳에 현대식 가옥을 건축 아름다운 잔디밭을 가꾸며정원수들이 즐비하며 조그마한 연못까지 만들어 재미있게 사는 것이 아닌가. 옛집을 허물었다면 참 쓸쓸하였을터인데 그대로 보존된 것이다. 그래도 세월이 흘러서인지 앞길 건너 개울물은 거의 메말라버려 옛정서는 찾을수 없는 것이다. 대신 그곳에 인공으로 물을 흐르게 하고 개울 양쪽으로 도보길 자전거길 등을 만드는 공사가진행 중이었다. 같은 동리의 작은 할아버지 댁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이렇게도 빨리 변해 가는데 내 외가서사리에는 그대로 원형이 보존되어 있었고 반세기만에 찾아온 객도 그때를 기억할 수 있다는 게 축복이었다.더구나 지금 찾아 온 것이 마지막일 것이라는 것이다. “형님 잘 오셨심더. 올해가 마지막으로 내년에는 재개발지역이 되어 이곳을 다 허물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답니다.” 그랬구나. 올해 외갓집을 잘 찾아왔구나. 그래도말이다. 다 없어진다 해도 내 마음에 서사리는 외갓집은 그대로 있는 것이다. 정서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