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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만의 외출 – 고향 대구

2016년 8월 16일

십년만의 외출 – 고향 대구

십년만의 외출- ⑫ 고향 대구

이번 2 개월간의 한국 방문에는 고향 대구를 두 번씩이나 찾아갔다. 숙소는 누이의 집이다. 일곱 형제들 다들 서울로 가서 뿌리 내리고 있지만 한 사람이 대구를 지키고 있는 샘이다. 대구에 머무는 동안에도 어김없이 새벽 산책은 계속했다. 숙소 아파트 옆에 한 중학교가 있다. 교문은 언제나 열려있어 새벽에는 동네 사람들이 와서 운동을 한다. 옛날학교 운동장에는 겨우 평행봉 철봉이 전부였는데 지금은 그 외에 여러 운동기구를만들어 학생들에게 그리고 동네 사람들도 이용하게 했나보다. 학교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잘 꾸며진 공원이 나오고 더 많은 운동 기구들이 설치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아침 새벽운동을 하는 것을 본다. ‘시와 함께 하는 오솔길’ 이라는 공원 한편으로 만들어 여러 시인들의 글들이 적힌 시비 같은 것도 있다. 읽으면서 사색하며 생각하며 걸으라는 말일 것이다.

“김 목사님 접니다.”
“아이구 목사님 어디십니까?”
“한국이지요. 그제 대구에 왔습니다.”
“대구 어디입니까?”
“달서구에요.”
“우리 교회도 아파트도 달서구인데 어느 동입니까?”
“본리동이라네요.”
“우리도 본리동인데 어느 아파트 단지입니까?”
“아카시아라는데”
“우리 아파트 맞은편이네요.”
“나와 보시면 남쪽으로 종탑이 보이는 교회가 만민교회입니다.”

그래서 만난 분이 가나안에서 오래도록 부목사로 수고하시던 김종대 목사님이시다. 가나안의 후임목사로 거의 결정이 되었는데 가사모의 장난으로 무산되었고 그 후로 교회가 어렵게되었다. 그 사이 김 목사는 한국으로 사역지를 구해 떠나셨는데 목회를 잘하고 계심을 늘 감사했는데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된 것이다.

가나안을 통해 여러 부사역자들이 훈련 받고 사역지를 찾아 떠난 분들 다들 목회를 잘하고 계신다는 소식은 담임목사로서의 큰 기쁨이다. 그렇다고 한국에 왔기에 그분들에게 연락하고 만나고 하는 일들이 그분들에게는 짐이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전혀 연락하지 않았지만 김 목사는 내 고향에서 목회하고 있었기에 이렇게만날 수 있었다. 오후에 교회를 찾았다. 내외가 맞이하며 칠층 교회 구석구석을 보여주시며 신이나 했다. 8 년간 가나안을 기억하며 열심을 다했단다. 그래서 큰 교회로 자라게 되었단다. 감사한 일이다. ‘해밥 달밥’이라는한식점에서 저녁을 같이 했다.

다음날은 박 장로 내외 안내로 그동안 발전된 고향 대구를 좀 더 살핀 기회를 가졌다. 무엇보다 서쪽으로 옛 성당못 안지랭이에서 동쪽 끝 가창골까지 연결된 우리가 흔히 부르는 앞산 즉 두류산을 관통해서 굴로 도로를 만든 것이다. 돌아가면 한 시간도 넘겨 가야 할 곳을 20 여분으로 단축하게 된 것이다. 대구에는 두 산이있다. 북쪽으로 팔공산으로 아버지 산이고 남으로 앞산은 어머니 산이라 한다. 이 어머니 산을 관통하는 굴, 즉터널을 만들려니 많은 반대가 있었겠지만 나에게는 경이롭다. 길이가 11Km 나 되는 터널이다. 작년 6 월에 개통했으니 꼭 1 년이 지나 내가 지나간 것이다.

그날 밤에는 대구의 야경을 볼 수 있는 ‘대구 83 타워’에 올라갔다. 옛날 청구타워라 했는데 지금은 대구 83 타워다. 서울 남산타워보다 높은 대구의 상징물이란다. 83 이란 83 층 쯤 된다는 뜻이나 그 77 층 쯤에전망대가 있어 대구의 동서남북을 시가지 전체를 볼 수 있다. 마치 시카고의 시어즈 타워에 온 기분이다.

이제 고향 방문도 마지막으로 떠나야한다. 매제 되는 황 목사의 건강에 비상이 걸려 언제 다시 만날지모른다는 아픔이 저려온다. 누이도 온갖 고생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말이다. 올 때 보따리 하나를 챙겨가야 했다. 미국을 떠날 때 남긴 수많은 일기장이며 내게 속한 물건들 버리고 처리해 달라 부탁했는데 학교시절 졸업앨범과 1960 년도의 일기장 한권을 그대로 간직해 있었단다. 그동안 몇 번 이사를 했어도 보물단지 모시듯 가져다녔단다. 이 보따리는 고향 대구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시카고까지 가져왔었다. 졸업앨범을 아직 가질 수 있다는 묘한 기쁨과 함께 1 년 치 단권 일기장은 그 속에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있기에 간직했단다. 언젠가출판하면 그대로 한권의 소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나. 남의 일기장을 몰래 읽었던 것이다.일기장 중 아까운 것은 1961 년 11 월부터 3 개월간의 내 병영일기책이다. 진해 훈련소로 갈 때 노트를 잘라 포켓에 들어갈 만한 일기장을 만들고 3 개월간의 훈련소 생활을 몰래 기록한 것이다. 담요 속에서 화장실에서 적은 것이다. 중도에 소대장에 발간된다. 단번에 하는 말이 “너 간첩이구나. 압수다.” 큰일 났다. 경을치겠구나 했는데 나중에 되돌려 주면서 “아무도 모르게 써야 돼.” 얼마나 고마웠던지 지금쯤 그 소대장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 월남전에 참전했다 크게 다쳐서 후송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때 일기장이 그대로 있었다면 귀중한 역사 일기장이 될 터인데 못내 아쉽다. 하지만 모든 것 세월 따라 사라지는 것 일기가 무슨…